지상 위의 풍경은 늘 예측 가능한데 건물은 하늘을 향해 솟아 있고, 사람들은 도로 위를 오가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아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는 또 다른 삶의 형태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지하도시 탐험이라는 주제는 단순한 모험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공간에서 우리는 때로 과거와 마주하고, 때로는 인간이 만든 경계의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이 글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지하에 감춰진 도시와 공간들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몰랐던 또 하나의 세계를 만나보려 한다.
터키의 지하미궁, 과거를 품은 공간
터키 카파도키아 지역의 지하도시 데린쿠유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거대한 미궁처럼 얽혀 있는 이 도시의 통로들은 마치 실타래처럼 복잡하고,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세계 지하 공간 중에서도 역사적 무게감이 남다른 이곳은 과거 종교 박해를 피해 사람들이 지하로 숨어들어 만든 생존의 흔적이다.
데린쿠유의 내부는 주거 공간뿐만 아니라 예배당, 학교, 와인 저장고, 심지어 가축을 기르던 장소까지 갖추고 있었다. 수천 명이 동시에 머물 수 있도록 설계된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작은 생태계이자 도시였다. 계단을 따라 점점 깊숙이 내려가다 보면, 지하 60미터 아래까지 연결된 길이 끝날 듯 말 듯 이어진다. 불 꺼진 좁은 터널 안에서 등 뒤로 닫히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는 순간, 마치 과거의 누군가와 숨을 공유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나 역시 이곳을 직접 찾았던 날, 처음엔 관광객의 시선으로 출발했지만 어느 순간 묘한 긴장감과 정서적 몰입에 사로잡혔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주변의 말소리가 줄어들고, 오직 내 발소리와 벽을 스치는 손끝만이 존재를 증명해주는 공간 속에서, 나는 문득 문명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데린쿠유는 단순한 유적지가 아닌, 인간의 공포와 생존의 본능이 만든 가장 극단적인 건축물이었다.
캐나다의 지하도시, 일상과 연결된 공간
만약 지하세계가 생존이 아닌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도시일 것이다. 몬트리올의 '레조'는 그런 의미에서 흥미로운 모델이다. 'RÉSO'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도시 속 숨겨진 장소는 무려 33km에 달하는 지하통로를 통해 쇼핑몰, 지하철역, 대형 극장, 호텔 등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다. 이 도시는 눈이 자주 내리는 추운 겨울을 견디기 위한 인간의 실용적 상상력에서 출발했다.
레조를 걷다 보면, 지하에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게 된다. 넓은 복도에 햇빛이 비치는 듯한 조명, 유리로 된 벽면, 미술 작품이 전시된 전시관까지 갖추고 있어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 공간처럼 느껴진다. 지하라고 해서 어둡고 답답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은 이곳에서 산산이 깨진다. 이곳의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일상의 연장선처럼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도 날마다 이곳을 이용하며 일상적인 이동을 이어간다.
내가 이 공간을 처음 걸었을 때,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지하라는 공간이 사람의 감정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시의 소음과 바람에서 잠시 벗어나 걷는 그 길은 오히려 더 도시적이고, 더 인간적인 온기를 품고 있었다. 지하가 단지 숨겨진 공간이 아니라, 열려 있는 가능성의 영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의 거대 배수시설, 기술로 완성된 미학
일본 도쿄 외곽 사이타마현에는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거대한 지하 공간이 존재하는데 '수도권 외곽 방수로'라고 불리는 이 시설은 범람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초대형 배수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 지하도시 탐험의 대상은 단순한 하수도가 아니다. 거대한 기둥이 늘어선 공간은 '지하 신전'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또 하나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수십 미터 높이의 기둥들이 빽빽이 늘어서 있는 이 공간은 보는 순간 압도된다.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이곳은 기능적인 구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인공의 구조물이 주는 냉정함 대신, 오히려 반복되는 형태 속에서 어떤 질서와 위엄이 느껴진다. 기능성과 예술성이 공존하는 공간, 그것이 바로 도쿄의 지하 방수로다.
직접 이곳을 투어한 경험이 있는데, 단순히 구조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이 담고 있는 목적과, 도시를 지키기 위한 기술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이었다. 가이드의 설명 속에서 들려오는 홍수의 역사와 대비책들은 단순히 기술의 승리가 아니라, 도시와 인간이 자연 앞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가려는 몸부림처럼 들렸다. 이 거대한 공간을 걷고 있을 때, 지하라는 단어가 더 이상 숨김이 아닌 드러냄이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세상의 이면은 언제나 조용한 곳에 숨어 있다. 지하라는 공간은 어둡고 밀폐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두려움, 실용성, 그리고 상상력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지하도시 탐험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관광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하고, 존재하지만 잊힌 공간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감각의 확장이다. 우리가 다음 여행지에서 지하로 내려간다면, 어쩌면 그곳에서 만나는 건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공간을 대하는 태도일지 모른다. 숨겨진 도시에서 우리는 숨겨져 있던 자신을 만난다.